저의 얼굴에는 마귀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편평 사마귀’라고 우툴두툴한 좁쌀 같은 것이 하나 둘 늘어나요.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는 안돼요.. 지금은 각종 비타민 + 율무팩 테라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얼굴에 뭘 이렇게 퍼다 부은 적이 없는데…
네, 저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없죠. 물론 만성적인 고민(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글은 왜 늘 쓰기 싫은가)들은 반려동물처럼 같이 사는 거구요. 간간이 오는 연애의 위기, 나날이 무거워지는 슬라임(물뱃살) 정도는 뭐, 그 정도면 붙어볼 만한 고민이죠. 뭐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예전에 다녔던 교회에서의 속회였다면 이때쯤, 자신의 세 번째 고민을 수줍게 나누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도.. 고민이에요..” 마치 인생 제일의 고민이 아니어서 송구하다는 듯이. 쭈뼛쭈뼛 하면서 말이죠. 슬쩍 속장을 살피면 이미 표정부터 – ‘괜찮아 임마, 다 그런 거지‘ – 이렇습니다. 속회원들도 너영나영 ‘신앙적 고민’을 주섬주섬 꺼낸 뒤, 마무리론 속장의 은혜로운 기도. 그제야 비로소 ‘다 이루었다’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린 구원받았고, 집으로 돌아가죠. 이 은혜 버프는 정확히 월요일 아침이 되면 산산이 흩어져 사라집니다. 똑같은 한 주가 다시 시작됐거든요. 그러니까 일종의 착각이었던 셈입니다. 주일마다 맞은 ‘은혜뽕’은요.
그런데 말입니다, 배화교회에 온 뒤로 전 이런 종류의 죄책감이 좀 덜했습니다. 애써 신앙적 고민을 끄집어낸 적이 없어요.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뭐가 달라진 걸까요? 배화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저는 지난시기의 저를 되돌아봅니다. 작년 8월부터 장장 7개월에 접어드는 저의 길고 긴 배화인으로서의 자ㅇㅏ와 정ㅊㅔ성.. (buffering 中) 충격적인 건, 돌아보니 저는 배화교회에서 ‘신앙적 고민’을 사람들과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신앙적 고민’이라고 따로 범주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마귀/ 연애/ 뱃살/ and 신앙. 이런 식으로 분류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좋아서 가는 기도회와 주일 예배, 손으로 쓰는 묵상은 점차 그냥 루틴이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그냥 제 고민을 나눴고, 그냥 말씀과 연결해 생각해 봤습니다. 그냥 해봤습니다. 그냥. 그렇게 자연스레 습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배화교회 성도님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자잘한 고민들을 말씀에 적용해보며 기도로 묻는 것. 일상적이다 신앙적이다 굳이 고민을 분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흔들리는 지남철의 바늘처럼, 휘어지더라도 위로 뻗는 해바라기처럼. 흔들리면서도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하는 사람들이 배화교회 안에 있어서 더불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 군포시에 사는 저에게 누군가 ‘군포 여행 어땠어?’라고 물으면 저는 그럴 겁니다. “뭔 소리야? 난 그냥 여기 사는 건데.” 크리스천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배화에서 함께 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