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좋아하는 찬송가 중 <저 장미 꽃 위에 이슬> 이란 곡이 있는데, 얼마 전 그 곡의 영어가사를 읽다 뭉클했습니다.
“이슬이 아직 장미 꽃 위에 있을 때, 홀로 정원에 갔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달콤한지, 지저귀던 새들도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들려 주시는 선율이 마음을 울립니다. 밤이 주위에 떨어지며 날이 밝아왔지만, 그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후렴구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And He walks with me and He talks with me, And He tells me I am his own. (그는 나와 함께 걸었고, 나와 함께 이야기 했으며, 내가 그의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And the joy we share as we tarry there, None other has ever known. (그 곳에서 우리가 지체하며 나누었던 기쁨을 아는 이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집니다. 정원을 거닐다 뜻밖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반가워하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에서는, 초막 셋을 짓자던 베드로 님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 곳에서 우리가 지체하며 나누었던 기쁨을 아는 이가 없다’는 부분은,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이,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존재가 예수님임을 깨닫고 벅찼을 때와도 닮은 듯 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하면서까지 저와 함께 걷고 이야기 나누시면서 “너 내 꺼야” 라고 다정하게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그만 세상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한국어 가사로는 이렇습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로운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저도 그 정원에 계속 머물고 싶습니다. 저를 인격적으로 아는 존재와 속 깊은 대화 나누면서, 착한 이야기 하고, 좋은 말들 하면서 기쁘게 말이에요. 그렇다면 오늘의 저는 좀 더 나은 사람이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세상으로 안 보내시면 안 되냐고 묻고도 싶습니다. 가사 속 정원 같은 순간을 실천하며 사는 게 주님 자녀로서 할 일 같기도 하지만, 부끄럽게도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요즘 저에게 어려운 순간은, 상대의 무례함에, 어이 없는 대응에, 생각도 못한 감정풀이에, 부당한 요구에, 때로는 대놓고 ‘당신은 교회 다니잖아. 당신이 참아야지’ 라는 말 앞에서, 그래서 단전에서부터 딥빡(!!!)이 올라올 때…ㅎㅎ 그럴 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욱한 김에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러면 안될 것 같고, 대응한다면 어느 선까지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틀리거나 잘못할 때도 많으니, 순간의 생각대로 하면 안될 것 같고요. 거기에 하나님까지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최소한 주님 얼굴에는 먹칠하지 않는 걸까요?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받아 칠 순간은 지났고,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가사가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있었던 일들 얘기하고(이미 다 아실 테니 수위조절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요^^a),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도 듣고, 위로도 얻고… 당신의 시간을 지체하면서까지 함께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 내 꺼야” 라니… 예수님 참 로맨틱하지 않나요?
저와 결은 다르더라도 이런저런 고민이 있으시다면, 혹은 오늘 평소보다 조금 더 지치셨다면, 저 가사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자녀로 산다는 게 순간순간 어떤 생각이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지 모를 때도 많고, 하기 싫은 방향일 때도 많지만, 예수님은 오늘도 내 편이시고, 내 빽이시고, 동반자로서 매 순간 같이 계실 겁니다. “너 내 꺼야” 라고 해주시는 말씀이, 고단한 오늘의 따뜻한 울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