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전혀 없는 캄캄한 동굴 속. 들리는 소리도 없고 발밑엔 물웅덩이가 있는지 낭떠러지가 있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뒤로 물러설 수 없기에 두려움을 안은 채 흐른 세월이 30년… 이 길 끝에 뭐가 있는가….
나 자신을 욥이라고 생각했다. 욥이 당했던 고통만이 나의 위로가 되었다. ‘나를 정죄하지 마시고 무슨 이유로 나와 변론하시는지 알게 하옵소서(욥10:2)’의 말씀이 ‘나는 이런 고난을 감당하기에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주님, 이 고난을 통해 주께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로 바뀌어 뱃속 깊은 곳에서 30여 년 동안 울려나왔다. 당시 내 심정은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욥14:14)’였다.
2017년 7월! 무더위 속에서 짐을 들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사랑하는 딸아, 힘들었지? 잘 견뎠다. 내가 그 길 같이 걸었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면서 운동장을 통과했다.
30년 동안의 질문에 대한 첫 응답은 중보자 예수님의 ‘임마누엘’이었다.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셔서 내 고통의 현장에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위로였다. 주님이 구세주로 오신 후에 내가 태어난 사실이 감사하다. 처절한 4중의 고통(재물과 자녀를 잃고 부인의 몰이해와 자신의 몸마저 아픈)에 싸여 있으면서 부르짖었던 욥은 얼마나 간절히 중보자를 원했을까?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욥16:19),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욥16:21),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19:25)’ 오늘도 나는 나의 대속자이자 중보자이신 주님이 살아계셔서 동행하심이 감사하다.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욥에게 주님도 질문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38:4),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욥38:16), 하나님처럼 천둥소리를 내겠느냐(욥40:9),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내거나 노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느냐(욥41:1)’ 등등……. 욥의 질문에 하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는 주님임을 말씀하신다.
피조물들이 창조의 섭리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시고 돌보시며 인간과 공존하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우월하다는 생각 대신 주님은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시고 계신다. 이것이 선의의 제재를 공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인 공의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사람의 기준과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지 않으며 인간은 스스로 영화롭게도 못 하며 교만한 자를 낮추거나 악인을 짓밟을 수 없는 존재다.(욥40:10-12)
어쩌면 욥은 자신의 간구에 대한 응답을 자신이 정해놓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을까? ‘젊어서 고생했으니 나의 노년은 행복할 거야. 공의의 하나님이시니 또 다시 큰 고통을 주시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한 나처럼.
그러나 이제는 공평과 공의로 다스리시는 완전하신 하나님께 나의 삶을 더 의탁하게 되어 감사하다. 나의 미래를 어찌 인도하실 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에서 다 증명되지 않더라도 영원을 통해 증명되니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눈앞의 고통과 선악에 대해 당장 응답이 없더라도 낙심하거나 조급하게 생각하며 살지 않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