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상을 지으며 아이들이 주로 호소하는 말이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만지작만지작 손을 뗄 수가 없다. 그런데 손을 대면 댈수록 가물은 논바닥처럼 작품에 자꾸 금이 생긴다. 어쩌면 좋을까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아이의 기분을 반전시킬 묘책이 있다.
물먹은 스폰지가 해답!
물에 적신 스폰지를 내주는 것이다. 건조한 스폰지가 물을 쫘악~ 빨아먹었다가 쭈욱 짜면 다시 주르륵 뱉어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관심을 이동시키기 충분하다. ‘저도 해보고 싶어요’ 하면서 장난으로 번져갈 때쯤 “그런데 있자나~ 이게 네 작품을 다시 반질반질하게 해줄 수 있다~ 한번 볼래?” 하면서 물먹은 스폰지로 거북이 등껍질 같이 되어버린 작품의 표면을 쓱쓱 닦아주면 아이들은 우와~! 하면서 다시 자기 작품으로 시선을 옮긴다. 물론 손이 야무지지 못한 아이들이 미끌거리는 작품을 만지작거리다 물에 빠트리기도 한다. 자기 주먹보다 작게 만든 작품이 물속에서 오래 버틸 리 없다. 금새 울상이 되려는 아이에게 “어? 사라지기도 하네?”하는 한마디로 간신히 위기를 넘기기도 한다.
흙이 주는 질문
나에게 흙이란 참 친숙한 대상이다. 대학생활 내내 흙을 만졌고 졸업 후에도 공예갤러리에서 일하고 오늘도 여전히 아이들과 흙을 만지며 산다. 하지만 여전히 흙은 나에게 새로운 질문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흙’ 도대체 무엇?
흙은 ‘독립된 물질’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마치 엄마와 아이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흙은 물을 만나 비로소 흙이 된다. 아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엄마와 항상 한 쌍이다. 흙도 물과 그렇게 한 쌍으로 존재한다. 물이 없다면 흙은 ‘후’하는 한 번의 날숨에도 사라져 버리는 먼지가 되고, 물이 적으면 너무 단단해서 고치기 어려운 돌덩이와 같고, 적당하면 말랑말랑해서 뭐든지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갈라져도 다시 매끈하게 하는 유연성도 갖는다.
인간, 흙으로 빚어진 존재
우리는 흙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제각각으로 만드셨다. 흙과 물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못하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물이 없는 흙이 논바닥처럼 갈라지듯이, 아무리 작품을 만들려고 손을 대 보아도 이전보다 나아질 수 없음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돌리는 시점을 만난다. 물이 없는 흙의 상태를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상태 또한 규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은 그래서 한 쌍이다.
그래서 질문,
물이 없어 굳어가는 흙을 본다. 하나님 없이 굳어가는 인간을 본다. 적당한 물을 머금고 말랑해진 흙을 만지며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 오늘의 저는 얼마나 말랑말랑 한가요?”